충남 시간 여행, 낭만열차를 타고 잊혀진 풍경 속으로~

잊혀진 풍경 속으로, 추억의 낭만열차를 타고 떠나는 충남 시간 여행

삶은 무엇일까. 고(故) 김수환 추기경은 열차 여행 중 "삶은 계란~"하고 외치는 홍익회 카트 아저씨의 소리에 문득 삶의 의미를 깨달았다고 한다.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아니라, 둥글둥글한 달걀처럼 소박하고 단순한 것이 삶이라는 것. 달걀은 부활의 상징이자 무한한 가능성과 영원한 생명을 품고 있다. 하지만 단단해 보이는 껍질도 함부로 다루면 깨져버리듯, 인생 또한 그러하다.

KTX 고속철도가 등장하기 전인 2004년 4월 이전, 기차 안 풍경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사람들, 홍익회 카트에서 맥주와 오징어 땅콩을 사 먹는 낭만, 느릿한 속도만큼이나 여유로운 풍경이 있었다. 이제는 사라져 버린, 아련한 추억 속의 기차 여행. 그 시절 낭만을 되살려 무궁화호를 타고 장항선을 달리는 '충남 레트로 낭만열차'에 몸을 싣고 시간 여행을 떠나본다.

추억을 싣고 달리는 기차, 낭만과 흥겨움이 넘실대는 풍경

서울역 오전 7시. 103년의 역사를 간직한 장항선으로 향하는 무궁화호 열차가 출발한다. 기차가 서울을 벗어나자 통기타를 든 가수가 나타나 조용필의 '여행을 떠나요', 김수철의 '젊은 그대'를 열창한다. 순식간에 열차 안은 흥겨운 노랫소리와 박수 소리로 가득 찬다.

교련복을 입은 스태프들이 홍익회 카트를 밀며 삶은 달걀, 바나나맛 우유, 공주 알밤 등 충남의 특산물을 간식으로 나눠준다.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뽑기 게임을 통해 푸짐한 선물도 받고, 알프스 소녀 하이디 복장을 한 가수가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요들송을 부른다. 경쾌한 멜로디에 맞춰 흥얼거리다 보니 눈 깜짝할 새 열차는 목적지인 예산역에 도착한다. 역시 여행의 즐거움은 설레는 출발이 절반을 차지하는 듯하다. '충남으로 떠나는 레트로 낭만열차' 승객들은 보령, 아산, 서산, 서천, 예산, 태안, 홍성 등 충남의 대표적인 7개 지역 명소 중 한 곳을 선택해 각자의 여행을 시작한다.

천년의 역사를 품은 고찰, 수덕사에서 예술과 역사를 만나다

예산 여행의 첫 번째 목적지는 1500년 역사를 자랑하는 고찰, 수덕사(修德寺)다. 수덕사는 우리나라 7대 총림(叢林) 중 하나인 덕숭총림(德崇叢林)이자 조계종 제7 교구본사로, 충남 일대에 약 50여 개의 말사를 거느리고 있는 중요한 사찰이다. 특히 수덕사 대웅전(국보 제49호)은 국내 목조건물 중 건축 시기를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더욱 크다.

고려 시대 목조 건축물인 수덕사 대웅전은 배흘림기둥에 주심포와 맞배지붕이 얹혀져 있어 힘찬 기상과 균형 잡힌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경허, 만공, 혜암 스님 등 근현대 불교사에 중요한 선지식들이 도도한 선풍을 이어온 사찰이기도 하다.

수덕사는 조선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과 현대미술 추상화가 이응노 화백이 한때 머물렀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일반인들에게는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대중가요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일엽 스님, 나혜석, 이응노 화백 등 근대 유명 인사들의 삶과 예술이 얽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수덕사 대웅전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 바로 수덕여관이다.

일주문 옆에 자리한 수덕여관은 나혜석이 머물렀던 곳이다. 수덕여관 주변에는 이응노 화백이 동백림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후 이곳에 머물면서 손으로 직접 새긴 문자 추상 암각화가 남아 있다. 수덕여관 옆 '선(禪)미술관'에서는 이응노 화백이 수덕여관에서 그렸던 수덕사 풍경 그림을 감상할 수 있다.

예당호 출렁다리에서 사과 와인까지, 예산의 매력에 흠뻑 빠지다

국내 최대 저수지인 예당호(禮唐湖)는 최근 예산군의 대표 관광지로 떠오르고 있다. 2019년 개통된 402m 길이의 예당호 출렁다리와 시원하게 뿜어져 나오는 분수 덕분이다. 하늘로 곧게 솟은 64m 주탑을 중심으로 양옆으로 펼쳐진 케이블은 거대한 황새가 길고 흰 날개를 펼친 듯한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한다.

예당호 주변에는 황새알 모양의 조형물도 눈에 띈다. 황새는 예산을 상징하는 새이기 때문이다. 삽교천, 무한천을 끼고 넓은 농경지와 범람원 습지가 발달한 예산은 황새 서식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인근에 있는 예산황새공원에서는 황새문화관, 생태습지, 사육장 등을 통해 황새를 보호하고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예산에 왔으니 예산 사과의 맛을 보지 않을 수 없다. 예산에서 사과 농사가 시작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23년부터다. 지금도 수령 100년이 넘은 예산 황토 사과나무가 자라고 있다. 고덕면 은성농원에서는 '추사(秋史)'라는 이름의 사과 와인을 만드는 양조장이 있다. 예산 출신의 조선 후기 역사학자이자 서예가인 김정희(1786~1856)의 호를 딴 이름이다.

캐나다에서 양조 기술을 배운 정제민 대표는 100년 사과인 예산 황토 사과로 시드르(사과주)를 만들고, 증류하여 프렌치 오크통에 숙성시켜 브랜디(칼바도스)를 만든다. 양조장 투어를 하면 식객 허영만의 사인이 있는 오크통을 볼 수 있다. 애플파이를 직접 만들어 사과주와 함께 시음하고, 9~11월에는 사과 따기 수확 체험과 음악회, 사과 축제가 열리기도 한다. 유럽식 양조장 문화를 체험할 수 있어 연간 3만 명 이상의 방문객이 찾아오는 명소다.

해미읍성의 교황빵과 유기방 가옥의 수선화, 서산의 봄을 만끽하다

충남 서산 해미읍성 앞에는 '교황빵'을 파는 가게가 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해미읍성 성지를 방문했을 때 드셨던 간식으로 선정된 빵이다. '키스링(Kiss Ring)'이라는 이름이 붙은 동그란 마늘빵은 서산 육쪽마늘로 만든다. 당시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시아 국가 중 최초로 한국을 찾아 서산 해미읍성과 당진시 솔뫼성지 등을 방문하며 평화의 메시지를 전했다.

교황이 해미읍성을 방문한 이유는 천주교 박해와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1866∼1872년 천주교 박해 때 1000명이 넘는 충청도 지역 신자들이 해미읍성으로 끌려와 갖은 고문 끝에 순교했다. 교황빵을 먹고 5분 거리에 있는 해미읍성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해미읍성의 정문은 진남문(鎭南門)이다. 이순신 장군도 10개월간 근무했던 해미읍성에는 남쪽에서 쳐들어오는 왜구를 막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진남문을 통과하자 오른쪽으로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300년 넘은 회화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온다.

충청도 사투리로 '호야나무'로 불렸던 이 나무의 동쪽으로 뻗은 가지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머리채가 매달린 채 고문당하고 죽어갔다고 한다. 회화나무 앞에는 죄수들이 갇혀 있던 옥사와 형틀도 복원되어 있다. 해미읍성의 옥사는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비오)가 순교한 곳이다. 다산 정약용도 1971년 신해박해 때 천주교 신자라는 죄명으로 해미읍성으로 유배를 왔다. 갖은 고문에도 굴하지 않던 신도들은 해미읍성 서문 밖 자리개돌에서 잔인한 태질을 당하며 죽어갔다. 그래서 박해 시대 신자들은 순교자들의 시신이 오가던 해미읍성 서문을 '천국으로 가는 문'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교황청은 무명 순교자의 넋을 기리기 위해 2021년 해미순교성지를 국제성지로 선포했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서산의 봄 풍경을 만끽할 수 있는 운산면 유기방 가옥이다. 유기방은 충남 민속문화유산인 고택에서 거주하며 관리를 하는 어르신의 이름이다. 유기방 어르신은 가옥 뒤 울창하게 자란 대나무 대신 수선화를 심기 시작해 지금은 2만 평이 넘는 가옥 주변 꽃밭을 관리하고 있다. 수선화는 원래 물가에서 주로 자라는데, 이곳에서는 집 뒤편 동산 울창한 솔밭 그늘에서 수선화가 피어난다.

소나무 숲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에 초록색 잎과 노란색 꽃이 바다처럼 펼쳐지는 풍경은 이국적이면서도 평화롭다. 추사 김정희도 제주 유배 시절 돌담 밑에 피어난 수선화를 좋아했다고 한다. 추사는 제주 사람들이 수선화의 가치를 몰라보는 것에 유배당한 자신의 쓸쓸한 처지를 느끼며 시를 쓰기도 했다.

올해 '충남 방문의 해'를 맞아 진행되는 '충남으로 떠나는 레트로 낭만열차'는 11월까지 총 8차례 운행한다. 상반기에는 5월 17일, 30일, 6월 14일 등 총 4차례 운행될 예정이다. 충남문화관광재단 이기진 관광사업본부장은 "1960~80년대 기차 여행의 감성을 장항선에서 그대로 재현한 충남 레트로 낭만열차는 중장년층뿐만 아니라 MZ세대에게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고 말했다.

미더유가 인정한 맛집, 가야수라간에서 궁중 음식과 농가 음식을 맛보다

예산 수덕사 가는 길에 있는 덕산면 가야수라간은 격조 높은 궁중 음식과 제철 나물로 만든 농가 음식을 한 번에 맛볼 수 있는 식당이다. 100년 된 소나무 숲 아래 밭에서 키운 더덕, 곰취, 표고버섯 등 다양한 식재료로 음식을 만든다. 궁중 음식 문화재단(이사장 한복려)에서 전수받은 '두부선', '월과채' 등의 궁중 음식과 배로 만든 깍두기, 표고 새우찜 등의 농가 음식은 충남 로컬푸드 맛집 평가 기관인 '미더유'로부터 별 5개를 받기도 했다.

충남 레트로 낭만열차를 타고 떠나는 시간 여행은 잊고 지냈던 추억을 되살리고, 충남의 아름다운 자연과 문화를 만끽할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 될 것이다.